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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같은 자발적 감시 체제의 성

상큼한 김선생 2009. 6. 4. 02:39

로또. 달콤한 말로 마케팅하여 대박친 상품이다. 서민들의 돈을 끌어다 세금을 확충하는 기막힌 정부의 상품! 어떤 사람이 1등을 했다더라, 어느 동네에서 1등 했다더라. 누가 로또로 엄청 벌어서 이 동네 떴대. 불확실한 소문과 '당첨되면 어떻게 숨지?' 하는 불안을 동시에 선물하는 로또! 그 로또는 독재체제와 유사하다.

알바니아 출신 프랑스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1981년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 조처를 당한 그 작품 '꿈의 궁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배경으로 한 그 풍자소설을 읽었다. 부서진 사월(재차 말하지만 부서진 4월로 검색하지 말 것!)처럼 몽환적이고 — 피가 나오지 않는 부분이 더 — 잔인한 작품이다. 겨우 두 권 읽고서 이스마일 카다레의 냄새를 알게 되었다면. 좀 건방진가 그래도 — 이 두 소설은 비슷한 면이 느껴져 — 할 수 없는 걸.

꿈의 궁전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제국의 모든 곳에서 꿈을 수집한다. 자신의 꿈 덕에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에 어렵지 않게 꿈을 수집할 수 있다. 만약 제국의 앞날에 불행을 암시하여 미리 예방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꿈을 꾼 이는 술탄의 딸과 큰 재산과 작위를 얻을 수 있다. 그게 그 소문이다. 꿈이 아무 영향을 안 끼치면 공친 거고, 영향을 끼친다면 바로 수도로 모셔간다.

로또를 하다가 1등에 당첨 되면 당첨금을 받으러 서울로 가야한다. 수도로 가야만 당첨금을 받을 수 있다. 당첨금을 받을 수 있는 그 본점에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인기인이 될 것이다. 과연 누가 모를까? 당첨되어 당첨금 받으러 가는 그 사람을?

꿈의 내용을 말하러 오는 사람은 대부분 글을 못 쓰는 이다. 그들은 필경사에게 받아 적도록 한다. 필경사는 꿈의 궁전에서 최하위직이다. 필경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꿈을 받아적는 일 뿐. 그 필경사가 받아적은 오는 꿈은 마차로 실어온다. 가끔 특정 꿈을 거부하는 말도 있다. 그럴 경우 제국의 변방이라고 할지라도 걸어서 가져가야 한다.

로또 판매점은 한 게임 당 그닥 큰 수익을 얻지는 못한다. 일정 이상의 판매가 이루어져야 어느 정도의 수입이 유지된다. 네트워크는 거부하지 않는다. 모든 돈을 가져가서 많은 수수료를 챙긴다. 은행은 그 돈을 관리함으로써 현금을 최대한 확보하게 된다. 로또는 구매하는 이가 봉이다. 결국 로또의 당첨금은 구입자 전체로 보면 결국 당첨되든 당첨되지 않든 마이너스에 불과하다.

꿈의 내용은 먼저 선별부를 거친다. 선별부에서 통과한 꿈은 해석부로 간다. 해석부에서 해석된 꿈 중 일부는 핵심몽이 되어 핵심몽 담당부로 간다. 그 핵심몽은 다시 해석되어 술탄에게 간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다시 수도로 모셔온 그 꿈을 꾼 이를 심문하여 계속 파고든다. 대부분 죽어서 나간다.

결국 피를 보는 것은 서민이다. 세금외에 자발적 성금을 떠안음으로써 부자의 재력은 유지되고 서민의 돈으로 모든 복지가 이루어지며 국가 예산이 더 확보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개뿔, 서민 모두 이용당하도록 만든 위장된 행복이다.

주인공은 이런 것들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다. 명문가 출신에 적합하며 중요한 사람이라는 취급만 받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꿈의 궁전의 최고 책임자가 된다. 그 과정에 자신의 가문과 술탄간의 알력 싸움을 보고 핵심몽은 조작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가 되어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로또는 당첨금의 양으로 꿈을 꾸게 만든다. 결국 모두가 손해 본다. 우리는 그 로또 외에도 경기 부양. 전체적인 수로 개인의 손해는 뒤덮어버리는 언론에 묻히고 만다. 우리는 전체라는 수로 조작된 것만 보고 최고 당첨금이라는 말에 자신의 눈이 다른 것에 묻어가는 것을 모른다. 쉽게 깨닫기도 어렵다. 깨달았다고 해도 우린 힘이 없다. 힘을 얻는다해도 그건 힘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만 봐도 쉽게 보이지 않는가?

전체주의 국가를 잘 묘사했다. 아무도 모를 수 밖에 없는 꿈까지 뭘 이용해서든 받아내는 개인의 비밀이 없는 국가. 언론의 자유가 없고 꿈조차 자유가 아닌 나라. 우리나라도 솔직히 비슷하다. 노무현 때부터 추진하던 실명제라던가, 정치 싸움에 어이 없게 이용당하는 — 개인적으로 이런 단어는 안 좋아하지만 — 국민이라던가…

작가는 공산 알바니아의 독재와 감시, 권력 싸움을 동시에 묘사했다. 과거 오스만 투르크라는 데를 배경으로 알바니아의 과거 영광을 추억하려 애쓴다. 실제 있었을지도 알 수 없는 가상의 기관 '꿈의 궁전'을 통해 과거의 알바니아로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풍자한다. 그 풍자는 우리에게도 통할 정도다. 교묘하게 감시 당하고, 인권이 탄압받는 곳이라면 어디에는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이다. 내가 로또로 비유했던 것은 자발적 감시라는 구조를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소설을 읽으면 어떤 분들은 이게 빨갱이들의 실체다 어쩌고 하면서 들뜨겠지만, 실제로는 그분들이 그렇게 당하는 민중이라는 것을 간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정도로 이 미국발 근본주의 기독교와 미국발 민주주의 수호에 익숙한 분들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코에 걸면 쇠코뚜레, 목에 걸면 교수대, 귀에 걸면 청진기 식으로 세뇌당한 분들이니… 어쩔 수 있나?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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