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해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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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연필흔적

R을 보다…

상큼한 김선생 2009. 6. 27. 16:14

R의 생활은 엉망이다. 밤에는 꿈에 시달리고, 낮에는 두통과 졸음에 시달린다. 사람을 만나면 사람의 눈을 마주보지 못한다. 이유 모를 불안과 두려움에 감히 누구의 눈을 오래 마주칠 수 없다. 자신감도 없고,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 의문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R은 밤새 시달린 꿈이 자꾸 떠오른다. 어느 순간 기억에서 사라지는 그런 꿈이다. 기억에서 사라지는 꿈이건 아니건 별 관계도 없다. 꿈을 기억하는 순간, 꿈을 잊는 순간, 꿈을 떠올리려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다. 미간과 이마 끝부분 그 사이 가운데를 찌르는 그 고통에서 해방된다면 꿈은 괜찮다.

R은 밖으로 나갔다. 걷다보면 좀 더 나아질 것 같으니 동네 한 바퀴라도 돌자. R은 걷고 또 걸었다. 길에서 가끔씩 마주치는 눈빛은 섬뜩하거나 우울하거나 같잖아 보였다.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은 비슷했다. 여름이라 그런가 다들 똑같이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냥 걸었다. 신경 쓰지말자. 쓸데 없는 거잖아.

R은 지갑을 꺼내어 지폐의 수를 살폈다. 오천원짜리 한 장, 천원짜리 두 장. 어제 음료수를 사고 남은 돈이 5000원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천원짜리 두장을 꺼내 로또 판매점에 들러 "로또 이천원치"라고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점원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R은 불안했다. 점장이 옆에서 저놈 뭐야 왜 쳐다보고 지랄이야. 그러는 것 같다.

R은 갑자기 되돌아 집에 가려다 말고, 구석진 골목을 다녔다. 사람들하고 마주치는 게 뭔가 이상하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죄 지은 것 마냥 불안하다. R의 생각은 구석 구석 사람들이 다 아는 것 같아 보인다. 거기다 R의 모습은 작고 별 볼일 없다. 옆에 있는 소형차보다 지면에서 더 위에 있는데 갑자기 작아진 기분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땀에 찬 머리가 덥다. R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묶는다. 아직도 이상하다.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잘 기억 안 난다. 옷 차림새도 이상하게 다 똑같다.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 나였다. R은 나였고, R이 본 사람은 모두 나였다. 모두 내 눈빛이다. 내 눈은 카메라의 화면을 보며 의지대로 조종해나간다.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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