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해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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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에

아, 고객님 잠시만요

상큼한 김선생 2009. 11. 24. 18:52

“다음 주에도 괜찮으시죠?”

“네.”

“그러면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네.”

상담을 끝내고 나왔다.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나 때문에 선생님이나 간호사 분들 모두 고생이 많다. 간호사 분이 이제 카운터로 나온다. 약이 나오려면 1분 쯤 걸릴테니 잠깐 앉아 있을까?

“만 오천원입니다.”

미리 준비해뒀구나. 앉을 새도 없이 바로 병원비와 약값을 치루었다.

“안녕히 계세요.”

밖에 나왔다. 손이 조금 시리다. 약봉지를 든 손이 명치 쯤 와 있다. 뭐야. 한 마디 툭 내뱉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조금 있으면 손이 따뜻해지겠지.

“오늘 몇 일이지?”

또 혼잣말이다. 그러고 폰을 꺼낸다.

“24일인가?”

웬 일이래? 폰에는 24일이라는 날짜가 찍혀있다. 버릇처럼 하는 혼잣말에 자문 자답하는 날짜는 항상 틀렸다. 오늘은 뭔가 좀 되려나?

오늘은 지난주와는 좀 달랐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선생님은 항상 이렇게 시작하셨다. 그러고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

“좀 상태가 안 좋아요. 절망스럽기도 하고, 멀미도 조금하고,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네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상담은 거의 이런식으로 진행된다. 지시적 상담과 비지시적 상담을 혼합하여 사용한다. 오늘은 거의 나 혼자 말을 했다. 지시도 없었고, 내가 말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정도였다. 덕분에 여러 가지를 반성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 공부를 하려고 이것 저것 뒤지다 복사할 것이 필요해 복사하러 근처 단골 문구점에 갔다. 30여장을 복사하여 계산하고 나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02-1588-XXXX’ 또 뭔 마케팅 전화냐;

“여보세요”

내 이름, 고객님 어쩌고 하며 상품을 소개한다. 고객님은 신용도 좋고 어쩌고에, 공제라나 뭐라나…

“저희 상품은 조건이 없습니다만, 현재 병원에 다니거나 약 먹는 거 없으시죠?”

“…”

짜증이 살짝 피어올랐다.

“고객님 괜찮으니깐 말씀하셔도 됩니다?”

웃기네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몇 개월이나 다니셨습니까?”

“10개월 넘었습니다.”

“1개월이요?”

“10개월”

“아, 고객님 잠시만요.”

예상했다. 놀랬구나 썅. 또 물어보러 가는구나.

“저 고객님 저희 상품은 그거 관계 없이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매월 2만 XXXX원 씩 20년 납부하시면…”

기분 상했다 쨔샤. 기분 상하지 말라고 받아주고 있었는데, 당해봐라. 그래도 진실을 이야기해야겠지.

“저, 제가 백수 거든요. 곧 군대에 가야 해서 어렵습니다.”

당황했나보다.

“네, 감사합니다.”

에씨… 기분 상했다. 다음부터는 그냥 바로 끊어야지.

집에 돌아와서 공부가 될 리가 있나? 버릇대로 올블로그에 들어갔다.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정신병원이 사라진 이탈리아라는 제목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블로그 글이었다.

덕분에 마음은 돌렸지만, 공부는… 날아갔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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